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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문>

  • 진행: 디일렉 한주엽 대표
  • 출연: 권오경 공과대학 융합전자공학부 석좌교수

 

-디일렉은 한국 반도체 공학회와 공동으로 『반도체의 미래를 그리다』 라는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권오경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님을 모시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 대해서 얘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공학한림원은 어떤 곳입니까?

“한국공학한림원은 1995년. 실제로는 1994년도에 처음으로 만들 준비를 했습니다. 미국이나 외국 같은 큰 나라들은 3개의 한림원이 있습니다. 과학기술한림원, 공학한림원 그다음에 의학한림원이 있습니다. 3개가 미국은 백악관의 콘트롤을 받습니다. 백악관이 요청하면 항상 백악관을 도와주고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브레인풀 역할을 합니다.”

-한림원은 용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카데미라는 의미입니다. 공학한림원은 공학자 중에 우수한 분들을 모셔서 그 사람들이 공학한림원의 멤버라는 것도 명예로운 거죠.”

-한림원은 아무나 멤버가 될 수 없죠?

“그렇습니다. 한국은 정회원이 300명 미만입니다. 중국은 1000명 미만입니다. 14억 인구 중에 1000만 명 미만이고 중국은 공정원이라고 합니다. 공정원 멤버가 되면 평생 연금이 나옵니다.”

-연금이요?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건 지장이 없도록 해주겠다.”

-공학한림원 한국에도 똑같이 공학, 과학, 의료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까?

“3개가 있습니다.”

-한국도 연금이 나옵니까?

“한국은 학술원만 연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죠. 교육부 산하에 있는 게 학술원입니다. 외국에는 별로 없는 제도입니다.”

-지금 공학한림원은 그러면 어디 소속 입니까?

“산업부에 소속돼 있습니다. 과학기술한림원은 과기부에 소속 돼 있습니다.”

-의료는 어디 소속입니까?

“보건복지부입니다.”

-그렇군요. 거기 회원 되려면 누가 추천해야 됩니까?

“정회원이 추천을 하고 심사를 거쳐야 합니다. 일단은 정회원 되기 전에 일반 회원이 먼저 되어야 됩니다. 일반 회원 중에서 정회원을 선임합니다.”

-일반 회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반 회원도 정회원이 추천을 해서 심사를 받는데 한 7대1 정도 경쟁이 심해서 추천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정회원님들이 추천하는 걸 좀 꺼려하십니다. 왜냐하면 본인한테 안 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추천하면. 막말로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 되면 기분 나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추천을 아주 친하지 않으면 하기가 좀 힘듭니다.”

-일반 회원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일반 회원은 400명 미만입니다.”

-400명 미만. 700분 정도 계신 거네요. 일반 정회원 다 합해서.

“그렇죠. 그런데 만 65세 넘으면 원로회원으로 됩니다.”

-원로회원이 되면 정회원에서 그 숫자가 빠져서 원로회원으로 가는 겁니까?

“그렇죠. 그거 빠진 만큼만 정회원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원로회원도 전에는 종신회원이었는데. 지금은 법을 좀 바꿔서 75세까지만 받고 있습니다. 너무 멤버가 많아지면.”

-정회원이 되면 좋은 점이 있습니까? 명예입니까?

“명예 밖에 없고 주로 봉사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공학계나 산업계를 위해서 봉사하는 겁니다. 공학한림원은 다른 두 개 한림원하고 다른 점이 학계가 절반이고 산업계가 절반입니다.”

-정회원과 일반 회원 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뽑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산업계라고 그러면 산업체에 더해 출연연까지를 산업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학계는 순수하게 학교만을 보고 있습니다.”

-명예 때문에 “나 한림원 회원이야” 라고 하시던 분들도 제가 듣기로는 그런 분들도 있으셨거든요. “나한테는 엄청난 명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정회원으로 계신 분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시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국내에서보다는 외국에서 아카데미 멤버라고 하면 더 인정하니까, 외국에 가면 그걸 많이 이용하십니다. 국내에선 별로 안 쓰십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몰라서 이것저것 여쭤봤습니다.

“외국에 가면 ‘내셔널 아카데미 멤버’라고 얘기하면 긴히 거기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거든요.”

-현재 한양대 공과대학 융합전자공학부의 석좌교수로 계시고 과거에는 디스플레이용 관련돼있는 구동회로 같은 것도 개발을 많이 하셨잖아요. 당시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능동형 OLED 삼성SDI가 상용화해서 MP3 플레이어에도 넣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교수님이 개발하신 거였죠?

“2000년도 중반에 삼성SDI 김순택 사장님께서 저한테 간곡하게 부탁을 하셔서 프로젝트를 저한테 주시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서 좀 봐달라.” 그래서 삼성SDI 자문역을 했습니다. 과제 프로젝트 하면서 자문역을 겸해서 왜냐하면 학교 교수가 프로젝트 없이 자문역만 할 수는 없거든요. 김순택 사장님이 많이 가교 역할을 하셔서 제가 2000년도 7월인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아몰레드(AMOLED)를 개발하시겠다 그래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때는 멤버들이 거의 몇 명 없는 한 30명 정도 되는 데서 시작을 했고. 그다음에 임원이 없어서 임원도 저희들이 초대하고 외부에서 뽑아오고 그런 역할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LCD가 굉장히 많이 뜨던 시기였는데요.

“평판 디스플레이는 LCD 이외에는 별로 없었죠. PDP가 좀 있었는데 TV용만 있었고 LCD가 주도하고 있었고,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LCD도 사이즈가 모니터 정도만 만들었지 40인치도 못 만들던 시절입니다.”

-그런 시기에 OLED를 하셨군요.

“그때만 하더라도 OLED 소재는 코닥과 미국의 듀폰 같은 데서 조금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소니가 굉장히 앞서가고 있었고요. 세이코 엡손이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PMOLED를 엡손이 먼저 만들어 출시했습니다. 삼성SDI도 PMOLED를 하고 있었고, LG전자도 PMOLED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동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AMOLED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이 김순택 사장도 미리 인지하셨던 거죠. 경영을 하시는 분이 그걸 인지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PMLCD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5인치 이상은 못 만듭니다.. 왜냐하면 한 개의 로우 라인 타임에 우리가 원하는 신호를 써주기가 시간적으로 딜레이되는 것 때문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근데 PMOLED는 더 심한 것이 OLED의 두께가 얇기 때문에 양극(Anode)하고 음극(Cathode)가 지나가면 캡이 너무 크기 때문에 3인치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그걸 미리 아시고 AM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던 거죠.”

-교수님은 현재 융합전자공학부에 계시는데 원래 전공은 어떻게 되십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제가 금성전기에서 통신을 했습니다. 통신을 하다 보니까 저희가 통신 기기를 만들려면 반도체 IC를 사야 되는데. 외국 업체에 얘기하면 “금성은 나도 모른다.” 안 팔았습니다.”

-왜 그렇죠? 많이 못 만들어서 그렇습니까?

“그때 통신 기기를 처음에 시작하는 회사다 보니까 외국에서 모르는 거죠. 그다음에 반도체 칩을 사서 만들면 우리가 좀 쉽게 만들 수 있는데 칩을 안 파니까 우리는 IC 기능을 보드에다 다 꾸며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PC 보드 사이즈가 IC 하나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PC 보드로 펼치면 PC 보드 30~40cm에 겨우 하나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을 한 40~50장 만들어야지 조그마한 통신 모듈을 만듭니다. 그걸 하면서 제가 느꼈던 것이 ‘반도체를 하지 않으면 한국에 전자 산업이 미래가 없다.’ 그런 것을 그때 이제 깨달은 거죠. 그래서 통신을 때려치우고 미국 가서 공부해서 반도체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성에 있으시다가 미국으로 가셨던 겁니까?

“그렇죠. 제가 금성을 들어간 이유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찍 군대를 갔는데 굉장히 불행하게도 땅굴 탐지 장비를 개발하는 일을 맡았어요. 그래서 땅굴 탐지 장비 개발하는 도면 하나하나가 다 비밀문서여서 제가 만든 비밀문서가 280개가 되더라고요.”

-어디 못 가셨겠네요?

“그래서 3년 동안 못 나간다. 거기에 걸려서 금성전기를 들어갔는데 그 당시에 금성전기 대표이사님이 차유배 사장님께서 제가 만든 땅굴 탐지 장비를 양산을 하셨거든요.”

-탐지했죠. 그걸 탐지했나요?

“탐지했죠. 그래서 사장님이 “너 못 가는 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신원조회 받고 나니까 찾아오셨습니다.”

-원래 대학 때 전공이 전자공학 쪽이셨군요.

“그래서 제가 금성전기로 들어가서 딱 3년 채우고 미국에 유학을 떠납니다. 떠나면서 통신에서 전공을 바꿔 반도체로 바꿔서 떠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양대로 오셨던 거군요.

“그러고 나서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6년 동안 반도체 연구를 했습니다.”

-그렇군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출신들이 많던데요.

“맞습니다. 유재희 교수님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계셨고 정덕균 교수님이 계셨고.”

-정 교수님도 그렇고요.

“꽤 많이 있죠. 아마 제가 가장 오랫동안 TI에 있었죠. 6년 정도 있었으니까.”

-그때 한 30살 정도 됐던 겁니까?

“아니요. 제가 군대를 갔다가 3년 후 유학을 가니까 한 28~29살쯤에 유학을 가서 스탠퍼드에 서 4년 동안 석박사를 마치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6년을 하니까 한국에 오니까 서른여덟이나 됐어요.

-그럼, 한국에 들어오셔서 학교로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는 뭘 하셨습니까?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가면서 지금 한참 한국에서 불이 붙고 있는 3D 패키징. 3D 패키징 기술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창업자들이 저하고 동기거나 저보다 조금 선배들이어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으로 와라” 하고 여러 차례 얘기를 들었는데. 제가 그걸 포기 하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갑니다. TI에 가기전에 스탠퍼드에 있을 때 저는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 그때만 하더라도 PC 스피드가 10메가클럭밖에 안 돌아갔거든요. 왜 10메가클럭밖에 안 도냐. 그것을 기가클럭으로 올리겠다는 일을 했어요.”

-그때가 몇 년도입니까?

“그때가 1983년도입니다. 원래는 제 지도 교수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전자빔 리소그래피를 하시는 분인데. 전자빔 리소그래피를 한 6개월 정도 하다 보니까 제 손톱이 남아나질 않더라고요. 매일같이 코일을 감아야 되는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정밀하게 코일을 안 감죠. 대충 감으니까 성능이 안 나오는데. 6개월 정도 열심히 해서 우리 연구실에서 했던 것이 리처드 파인만 교수가 어떤 얘기를 했냐 하면 200 옹스트롬 미만의 아티피셜 패턴을 만드는 사람한테 자기가 받은 노벨상금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 지도 교수가 우리한테 내걸은 것이 “우리가 그걸 해서 절반을 뺏어 먹자” 그래서 그것 떄문에 6개월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제가 어떻게 만들었어요. 170 옹스트롬 아티피셜 패턴을 만들어서 그걸 하고 나니까 매일같이 손톱에 피가 철철 나오고 하니까 그만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금성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것이 스피드를 올리려면 칩으로 작게 만들어야 되는데, 작게 만들어도 CPU 스피드가 10메가클럭밖에 안 도냐라고 해서 제가 CPU 칩을 열어 봤습니다. 열어 봤더니 그때만 하더라도 메탈이 원 레이어 메탈밖에 안 쓰기 때문에 속도가 날 수가 없는 거죠. 제가 생각했던 것이 “구리 인터커넥션을 해야 된다.” 근데 구리 배선을 칩 안에다 하려고 그러는데 그것을 못 하게 하죠. 왜냐하면 오염 문제 때문에 스탠퍼드 팹 안에는 구리가 못 들어갑니다. 제 지도 교수한테 얘기해가지고 복도에라도 제가 후드 하나 달아서 거기서 구리를 입히겠다. 그래서 그걸 허락해 주는데 지나가는 교수들마다 “야 뭐 하냐” 쳐다보면 “구리입니다.” 그러니까 “야 팹 안은 절대 못 들어가.” 매일같이 야단만 맞죠. 그런데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서 만든 CPU 중에 라인이 긴 라인을 알루미늄 인터커넥션을 하지 않고 다른 실리콘 기판에 알루미늄을 해가지고 거기를 플립칩을 붙였어요. 붙였더니 10메가클럭으로 돌던 것이 100메가클럭으로 도는 거예요. 10배가 늘었어요. 그래서 제가 설득을 해서 구리를 해야 된다. 그래서 제가 박사학위 논문이 구리 인터커넥션이거든요.”

-그렇군요. 실제로 우리가 상용 라인에서.

“쓴 것은 1997년도쯤 쓰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팹 안으로 들어가고 공정 개발하는데 한 십여 년이 걸리죠.”

-시간이 많이 걸렸죠. 그렇군요.

“그래서 그 카파(구리)가 되기 전까지는 제 생각에는 칩을 가지고 3D 패키징을 해서 스피드를 올려야 된다. 그런 생각을 했었죠.”

-지금 엄청 뜨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뜨고 있는 거예요. 제가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 처음 갈 때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서 CPU 칩하고 GPU 칩하고 캐시 메모리 같은 조그마한 패키지에다 내서 멀티칩 패키징을 해주겠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갑니다. 그래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GPU나 CPU는 설계만 받으면 양산을 할 수 있는 거죠. 메모리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잘하니까 그걸 가지고 당시에 2D 패키징을 해서 그래서 굉장히 작게 CPU 칩을 리플레이스 할 정도로 만들었습니다. 데모를 해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피드가 거의 한 700메가클락이 됩니다.”

-그때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계셨을 때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게 받아서 작업을 하셨던 거군요.

“그렇죠. 그래서 그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로 가져간 거죠.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도 레비뉴가 많이 생기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과거에는 여러 가지를 많이 했었네요?

“그래서 3D 패키징 하는데 제가 하다 보니까 문제점이 있더라고요. 내가 그걸 계속하기에는 그것만 하면 내가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 판단을 해서 좀 바꿉니다. 그것을 다른 매니저한테 넘기고요. 제가 고민을 하다가 그 당시에는 SOI(실리콘 온 인슐레이터)를 좀 해보고 싶다.”

-SOI(실리콘 온 인슐레이터)요?

“SOI(실리콘 온 인슐레이터). 그때 SOI가 약간 붐업이 될 때였습니다. 칩에서 스피드를 올리려면 정션 커패시턴스을 줄여야 되는데 정션 커패시턴스을 줄이려면 SOI 기술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그 기술을 가지고 스타트를 했습니다. 싸임웍스테크놀러지도 만들고 본딩 웨이퍼도 만들고 두 가지를 다 해가지고.”

-말하자면 그때는 공정 쪽 하셨었네요.

“스탠퍼드에서 공정을 주로 했고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 처음에 가서 공정을 주로 많이 했는데. 약간 설계를 가미한 공정을 담당했습니다. 설계 쪽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 이유가 내가 늙으면 공정만으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큰 회사를 나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장비가 없으니까. 그래서 설계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정을 하면서 설계를 약간 가미한 공정을 해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그만둘 때는 설계가 70% 공정이 30%로 해서 그만두죠.”

-그렇군요. 그렇게 양쪽을 다 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던데요.

“많진 않죠. 그래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SOI를 하다 보니까 PDP 드라이버 IC를 일본 TI 재팬에서 해달라 마쓰시타 PDP를 만드는데 SOI 공정이 꼭 필요하다. PDP가 뭔지도 모르고 스펙을 받아서 그걸 만들어 줬습니다. TI 있을 때. 그래서 TI 재팬에다가 그 기술을 트랜스퍼를 해주고 났더니 TI 재팬에서 또 찾아왔어요. TI 재팬 부사장이 찾아와서 나한테 “권상. 자기가 보기에는 PDP 드라이버 IC가 진짜 잘 되는데 고맙다. 근데 LCD 드라이버 IC를 좀 해달라.” 그래서 “LCD가 도대체 뭐냐?”라고 했더니 LCD 드라이버 IC를 그때는 바이폴라를 가지고 만들었는데 그것을 CMOS 공정으로 컴버팅을 해달라.”

-그때가 몇 년도였습니까?

“그때가 1988년도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때 일본 기업들이 정말.

“샤프가 TFT LCD를 하는데 TFT LCD 드라이버 IC 바이폴라로 하다 보니까 누설전류 문제가 많고 파워 소모도 많으니까 CMOS로 바꿔달라해서 고압 CMOS 공정을 개발합니다. 그때 아마 유재희 교수님도 계셨을 것 같은데 가끔 밤에 테니스 치면서 제가 고압 CMOS를 한다고 그러면 그게 뭐냐 하고. 한 1년 만에 이 기술을 트랜스퍼를 했습니다. 제가 고민을 좀 해보니까 이 고압 CMOS를 하다 보니까 BCDMOS를 같은 칩에 넣어야 되겠다. 바이폴라하고 CMOS하고 LDMOS를 같은 칩에 넣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BiCMOS 공장을 TI에서 개발을 합니다. 그때는 자동차용 BiCMOS 공정을 개발하기 위해서 GM(제너럴모터스)에서 펀딩을 1000만 불을 받았고요.”

-TI 쪽으로.

“그다음에 포드에서 1000만불을 받아서 2000만불을 가지고 그 일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거는 펀딩을 받았다는 표현보단 개발비를 받았다.

“그것을 해서 BCDMOS 공정을 세계 최초로 개발을 하죠. 개발한 것이 1990년도고요.”

-교수님 개인적인 특허나 이런 것도 있으십니까?

“TI에 많이 있죠. 그걸 개발을 하고 나서 1992년도에 한국에 나왔는데. 아마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부천에 있는 아남반도체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D램을 양산하기 위해서 TI가 D램향으로 그것을 지어준 거거든요. 그 돈은 아남이 내고 설계는 TI가 한 겁니다. 제가 중간에 한국 사람이다보니까 인터페이스를 했습니다. TI가 D램을 포기하면서 마이크론으로 팔아버리면서 아남반도체는 졸지에 D램 생산하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그런 꼴이 돼버린 거죠. 그래서 TI가 고민했던 것이 “그럼 BCD(Bipolar CMOS DMOS) 공정을 너희한테 그 대신 심어주마”

-그게 지금 DB하이텍의 공정.

“DB하이텍의 메인 공정이 된 거고요.”

-그렇군요.

“그래서 TI가 BCDMOS 공정을 1991년도에 심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까마득하게 잊고 지났는데 오명 사장님이 동부하이텍에 가시면서 저를 콜 하셨어요. “당신이 개발한 거라는데 이것이 옛날 것이어서 도저히 못 써먹겠다.” “그걸 업그레이드를 해달라” 아마 2000년도 초반인 거 같아요.”

-2000년대 초반에요. 그때 작업을 같이 하셨습니까?

“3년 동안 업그레이드하는 공정을 했습니다. TI에 있을 때는 저희들이 0.35 마이크론 공정이 있는데 그걸 0.13 마이크론 공정. 130나노로 해주고. 그 모태가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한국 반도체 쪽에도 영향을 많이 미치셨네요.

“제가 원래는 반도체 전공이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서 디스플레이를 하게 된 원인도 굉장히 심플한데. 그때 1992년도에 막 LCD의 시작을 한국 회사들이 LG, 삼성, 현대, 삼성전관(현 삼성SDI)도 포함해서.”

-정관이 삼성SDI죠.

“LCD를 하겠다고 다 덤벼드는데 LCD 드라이버 IC를 TI 밖에 생산 안 하는데 사러 갔더니.”

-당시에는 그랬군요.

“일본에 갔더니 자기네 샤프한데 팔 물량이 모자란다. 한국 가서 권 모 교수가 개발한 거니까 가서 물어봐라. 4개 업체가 거의 동시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1992년도에 한국에 8월에 왔는데요. 9월에 그런 일이 발생을 합니다. 저는 한국에 나올 때도 TI에서 사표를 수리를 안 해줘서요.”

-한국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으로 온 이유는 굉장히 심플합니다. 제가 한양대를 나왔는데 한양대 총장님께서 그때 1992년도가 처음으로 교육부에서 전자학과하고 물리학과를 평가해서 줄을 세우는 해였습니다.”

-그 해가요?

“나중에 대교협의 평가로 바뀌고 지금은 아마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첫 번째 대학 평가를 해서 전국 학교를 줄을 세우는 일을 하겠다고 그래서 TI에 저를 찾아오셔서 “학교를 위해서 한 번만 좀 도와달라.” 그래서 제가 한 학기만 가면 되는 줄 알고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 와서 최상위급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국내 기업들이 어쨌든 콜이 많이 왔군요.

“9월에 그런 일이 있는 바람에 제가 그 기업들한테 똑같은 답을 했습니다. 저는 디스플레이가 뭔지도 모르고 스펙을 정확히 주면 IC는 개발할 수 있는데 IC를 개발할 팹도 없고. 내가 인력도 없고 장비도 없고 공간도 없다. 그때는 학교의 공간도 없었거든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못 한다. 하고 그런 얘기를 드렸더니 알겠다고 가셨어요. 보통 오신 분들이 임원급이 오셔서 그 얘기를 가지고 사장님한테 보고를 하신 모양이에요. 그중에 첫 번째로 저한테 아무리 저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연구비를 학교로 넣은 기업이 있었습니다. 연구비를 10억원을 넣어줬습니다.”

-그때 돈 10억원을.

“10억원을 넣어줬는데 학교가 깜짝 놀랐어요. 무슨 연구비가 10억원이 필요하냐. 그래서 이사장님까지 발칵 뒤집어 뒤집어졌습니다.”

-기업은 지나간 얘기니까 어디입니까? LG입니까, 삼성입니까?

“LG반도체에서 문정환 부회장이.”

-92년도에.

“그래서 굉장히 당혹스러웠습니다.”

-10억원은 다 그래서 연구비로 쓰셨습니까?

“10억원을 학교에 받으니까. 10% 오버헤드를 떼고 제 개인 통장을 넣어주더라고요. 당혹스러워서 제가 문정환 부회장님. 그때는 사장님이셨는데 찾아가서 “저 과제 못합니다.” 과제 관리도 학교에서 오버헤드만 떼어 먹고 과제 관리도 안 하고 나보고 하라고 내 개인 통장을 줘서 나는 과제 못합니다. 잘못하면 이상한 꼴이 나거든요. 미국 입장에서 생각하면 관리를 해주지도 않고 나보고 관리하라고 그러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저는 관리할 인력도 없고 그랬더니 고민을 좀 하시다가 그분이 며칠 후에 저한테 “방법이 있다” 해서 그분이 회계할 수 있는 비서 한 명하고 ERP 시스템을 연구실에 심어줘라. 그래서 ERP 시스템을 그때 처음 도입했습니다. 그때는 한국의 ERP 시스템이 간이 세금 계산서는 10만원 미만이면 간이 세금 계산서를 끊을 수가 있어요. 10만원 이상이면 세금 계산을 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한테 말씀하시기를 학교니까 만원 이상이면 무조건 세금 계산서를 끊어라.”

-1992년도에 만원이면 어느정도였죠?

“대부분이 다 세금 계산을 끊을 수밖에 없는 거죠. 연구하면서 만원 미만짜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간이 세금 계산서를 거의 안 썼고요. 유일하게 ERP 시스템을 가지고 연구를 한 교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애로사항도 많이 겪습니다. 1998년도에 한양대학교 세무조사가 나왔는데요.”

-대학도 세무조사를 받습니까?

“세무조사 나왔는데 연구비가 관리가 안 됐다고 하는 바람에 연구비가 가장 많은 저부터 세무조사를 받은 겁니다.”

-ERP 안에 다 있으면 자료가 다 있을 거 아닙니까?

“국세청에서는 학교에서 ERP를 쓰는 건 이상하다. 이놈이 원래 떼먹으려고 작정하고 이런 거다. 그렇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때만 하더라도 세무조사를 받으면 욕을 마음대로 합니다. 그놈들이 와서 그러면 교수님한테 한 욕 아닙니다. 옛날에 세무조사 하던 생각이 계속 나서 그 사람한테 한 겁니다. 아 일하세요. 그 옆에서 계속 욕을 해요.”

-연구비를 많이 받으셨나 보죠?

“연구비가 꽤 많았죠.”

-그걸로 LCD 드라이버 IC를 그때 개발을 해 주셨던 겁니까?

“여러 가지를 했는데 LCD 드라이버 IC하고 PDP 드라이버 IC. 그 두 가지를 했습니다.”

-그 설계를 교수님이 다 하신 거예요. 아니면 같이 하는 연구 인력들이 있었습니까?

“처음에는 우리 연구 인력이 없어서 회사에서 사람을 파견 받았어요. 회사에서 사람을 파견받았어요. 그래서 LG반도체에서 파견받고 그때 오리온전기라고 거기서도 1년에 5억원씩을 주고 파견도 받았습니다.”

-옛날에 모니터 하던 그런 회사 아닙니까?

“오리온전기는 CRT하던 회사인데 CTN LCD를 하겠다고 박박 우겨서. 그다음에 삼성 LCD 사업부에서도 지원받고 그래서 디스플레이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디스플레이를 모르는 사람이 그 드라이버 IC만 개발한 경험밖에 없는데 모르잖아요.”

-그래도 계속 이렇게 개발하시고 또 이렇게.

“처음에 수탁과제를 받아서 하다가 스펙을 달라고 그러면 스펙을 가지고 와요. 이렇게 해주십시오 해서 가지고 왔는데 2개월만 지나면 스펙이 또 바뀌어요. 계속 스펙이 바뀌다 보니까 제가 과제를 잠정중단을 하고 “3개월을 중단하자. 내가 LCD 공부를 좀 하겠다.” 그래서 제가 LCD 공부를 시작합니다. 3개월 동안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를 해서 아마 제 평생에 가장 열심히 그때 공부했을 거 같고요. 그래서 LCD가 어떻게 동작하고 하는 걸 다 꿰차고 그때부터 스펙을 제가 정했습니다.”

-그전에는 주던 것만 받아서 하시다가.

“주는 게 바뀌는데 왜 바뀌냐 하고 물어보면 우리가 일본의 산요가 LCD를 하는데 이런 방법으로 해서 그 방법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스펙을 계속 바꾸는 거예요. 소니가 이렇게 하니까 바꾸고 샤프가 이렇게 하니까 또 바꾸고. 그래서 제가 그다음 스펙을 제가 정해서 개발을 하죠.”

-스펙 정하기 전에 미리 교수님이 다 이렇게 조사를 다 하시고 이 방법이 제일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스펙을 그렇게 딱 정해서 가는 거군요.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 IC를 다 해줬다는 얘기입니까?

“거의 다 해줬죠. 오리온전기는 제가 해줘도 받아 갈 인력이 없어서 결국은 실용화는 못 했습니다. 삼성이나 LG는 그래도 인력이 있으니까 받아가서 생산은 본인들이 하셨고.”

-언제까지 그렇게 많이 하셨습니까?

“IMF 전까지는 열심히 그렇게 하고 IMF가 되면서 쉽지는 않았죠. 연구비가 줄어들고 그래도 줄어들었지 끊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끈을 갖고 가야 같이 나중에 도움도 받고 그러니까.

“10억원 주는 걸 5억원으로 줄이고 5억원 주는 걸 2억원으로 줄이고.”

-그때 당시에 연구비를 교수님이 한양대 안에서 제일 많이 받으셨던 겁니까?

“넘버원이었죠.”

-그렇군요. 연구비를 많이 받으면 교수님들이 밑에 학생들도 많이 받을 수 있나요?

“학생들도 많이 받을 수 있고. 학생들 인건비를 주니까 제가 최초로 학생 인건비를 줬던 사람입니다.”

-한양대에서요?

“그전에는 인건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배 교수들이 우리 학생한테 불러가지고 야단도 많이 치고. “너 한 달에 돈 얼마 받았냐 한 달에” 저한테 와서 야단도 치고.”

-돈 왜 주냐고요?

“왜 주냐. 그래서 그런 애로사항도 많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교수님이 그렇게 디스플레이 IC 하시면서 연구비 많이 받으셨다면 지금은 어디가 제일 많이 받습니까?

“제가 은퇴 후 석좌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학생이 4명밖에 없습니다. 4명 밖에 없기 때문에 과제를 딱 2개만 하거든요. 그 학생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과제를 딱 2개만 하기 때문에 4명을 먹여 살리려면 한 3억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제가 여쭤봤던 거는 교수님 말고 지금 현업에 계시는 교수님들 중에 과제비를 가장 많이 받는 교수님이 어딘가 왜 여쭤보냐면 그게 제일 유망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여쭤봤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디스플레이 쪽이 그런 데는 연구비가 괜찮습니다. 그다음에 반도체 쪽이 괜찮습니다.”

-지금 디스플레이 쪽은 거의 그럼 초창기 때부터 교수님이 드라이버 IC로 참여를 하셨던 건데. 좋던 싫든 간에 어쨌든 교수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 산업계에서 그냥 이렇게 산업을 보면 디스플레이 산업은 힘들거든요.

“지금은 드라이버 IC는 제가 손을 놓은 지가 굉장히 오래됐습니다. 왜냐하면 드라이버 IC는 대기업이 삼성이랑 동부하이텍(현 DB하이텍)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개발하는데 필요하면 안 해주니까. 그건 저희들이 만들어 쓰는 거고요. 지금은 주로 AMOLED 같은 경우에는 삼성SDI 처음 시작해서 모바일용으로 만드는 화소 구조가 제가 발명한 화소 구조입니다.”

-그 펜타일이라고 하는 구조입니까?

“펜타일 안에 들어가는 화소 구조인데요. 화소 회로가 트랜지스터가 7개 하고 커패시터 1개로 된 7T1C 구조라고 하는 것이 유명한 겁니다. 지금까지도 쓰고 있습니다. 제가 2004년도에 발명한 건데 아직까지도 쓰고 있습니다.”

-특허 같은 거 내셨나요.

“특허 냈는데 그 삼성SDI에 어떤 임원께서 특허를 주면 50억원으로 사겠다고 했는데 결국 50억원을 못 받고 뺏겼어요.”

-그쪽에 귀속됐습니까?

“그걸 먼저 이관해주면 특허료 50억원을 주겠다고 얘기했는데, 먼저 주니까 1~2년 미루다가 그 양반이 부사장으로 퇴임해버려서 본인만 승승장구해서 승진하고 말았어요.”

-계약서 이런 거 쓰고 주셔야죠.

“근데 그 계약서가 의미가 별로 없는 것이 개인이 쓴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거의 없는, 회사 이름을 썼어야 했는데.”

-그래도 교수님 문제는 크게 안 삼으셨나 봐요?

“그거 가지고 왈가왈부해봐야 그 양반도 인생이 불쌍하잖아요.”

-그렇군요.

“그래서 지금도 쓰고 있고요. 모바일향은 그렇게 됐고 TV향도 제 특허인데. LG디스플레이에서 쓰고 있는 것도 외부보상이라는 겁니다. 내부보상은 내부에서 화소 회로 내부에 다 보상을 하는 겁니다. 외부보상은 OLED까지 보상을 해야 합니다. OLED 번인 현상까지 보상을 하려면 외부에서 보상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외부보상을 만들었던 거고요. 그것도 원래 삼성SDI 줄려고 그랬더니 쓸 생각이 없는지 50억원을 못 주는 바람에 미안해서 그랬는지.”

-LG는 돈을 좀 줬습니까?

“LG는 연구비로 해서 학생들을 풍요롭게 살게 해줬죠. 그래서 LG에다가 그걸 드렸고요. 그래서 LG디스플레이에 그 특허가 없었으면 아마.”

-보상회로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보상회로가 없었으면 아마 못 했을 거다. 그래서 그 보상회로도 보상하려면 내부를 읽어내는데 그 드라이버 IC에서 읽어내도록 드라이버 IC까지 저희들이 만들어서 데모를 했습니다. 지금 LG디스플레이 쓰고 있는 화이트 OLED 외부보상 콘셉트도 저희가 만들어 드린 겁니다.”

-교수님 말씀하신 내용 들어보니까 그 시기에는 이쪽 분야에서는 교수님 같은 분이 계셔서 뭔가 산업계보다 선도하는 뭔가 기술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도 받고 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 여러 가지 산업을 봤을 때는 어떻습니까? 반도체도 그렇고 디스플레이도 그렇고 이제는 그냥 우리 산업계에 갖고 있는 기술이나 인프라나 경험보다 학교가 많이 뒤처진다는 이런 식의 얘기들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는 선두주자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모든 걸 다 보면서 갈 수 있었는데. 지금 산업계를 예를 들어 삼성디스플레이나 LG디스플레이도 연구원만 해도 몇천 명입니다. 몇천 명이 하는 걸 한 사람 교수가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교수가 리딩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인데. 그래서 저는 교수님들한테 많이 드리는 말씀이 “지금 당장 있는 것을 가지고 하려고 그러지 말고, 먼 미래에 5~10년 후에 대박이 날 만한 기술을 선점해라. 그래야지 끝까지 본인이 오너십을 가지고 갈 수가 있다.” 그런 말씀을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1990년대부터 올레도스(OLEDoS:OLED on Silicon)라고 하는 마이크로디스플레이 입니다. 1990년대부터 제가 언젠가는 상용화가 된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서부터 제가 시작해서 아직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시대가 뜨면 뭐 그게 엄청 또.

“LG디스플레이도 하고 있고 삼성디스플레이가 서로 간에 지금 난리를 치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쉬운 게 아닌 것이 반도체 칩으로 반도체 웨이퍼에 백플레인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반도체 기술입니다. 그런데 디스플레이하는 회사는 반도체 기술이 없어요.”

-삼성전자는 있지 않습니까?

“삼성디스플레이는 반도체 기술을 안 하죠.”

-삼성 가족 안에 있지 않습니까?

“삼성파운드리에서 해야 되는데. 파운드리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굉장히 쉽게 얘기하면 그겁니다. 내가 뭘 만들고 싶어서 파운드리를 얘기하면 “그 물량이 내년에 매출이 얼만데?” 매출이 없으면 안 합니다. 이재용 회장이 얘기를 하면서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업부는 매출이 중요하거든요. 매출이 중요하기 때문에 매출이 내년도에 없으면 왜 열심히 해야 되냐, 인력도 많이 투입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거든요. 메타버스 시대에 마이크로디스플레이는 새로운 개념이 거기에 들어가야 됩니다. 메타버스가 되려면 그 전체가 다 몰입형 화면이 되려면 해상도가 가로로 8K. 세로로 미니멈 6K가 돼야 되거든요. 그런 굉장히 작은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도대체 어디냐. 그 디스플레이를 가지고 어떤 광학 시스템을 가지고 굉장히 콤팩트하게 메타버스 시스템을 만들 거냐. 광학 시스템에 따라서 디스플레이가 바뀌어야 되고, 디스플레이에 따라서 광학 시스템이 또 바뀌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융합하지 않으면 실제로 가치가 있는 메타버스 시스템을 만들 수가 없는 거죠. 그런 거에 대한 개념이 아직 없어요. 삼성디스플레이는 삼성디스플레이 나름대로 저한테 물어보고 삼성반도체는 반도체 나름대로 물어보고 LG디스플레이는 저희하고 4K by 4K를 했거든요.”

-그건 언제 한 겁니까?

“2년 전에 끝났어요. 끝나서 기술 다 트랜스퍼 했습니다.”

-그 LG디스플레이도 웨이퍼 기술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SK하이닉스와 하려고 하고 있고.”

-보도가 좀 됐죠.

“그걸 할 때는 우리가 동부하이텍의 공정을 만들어서 해 드렸던 겁니다. 동부하이텍은 8인치 웨이퍼이기 때문에 채산성이 안 나와 12인치로 가야 하거든요. 메타버스를 제대로 만들려면 적어도 공정이 22나노나 28나노 공정을 써야 됩니다. 고압 CMOS을 쓰더라도 그 정도 공정을 슈링크 해가지고 가야 되는데. 왜냐하면 내부에는 디스플레이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CPU 칩 비슷한 것도 그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메모리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야 되고요. 왜냐하면 프레임 메모리는 아니지만, 서브 프레임 메모리 2개가 들어가야지만 빨리 받아서 압축한 영상을 복원해내고 그다음 영상을 받아들이고 해야 되는데 메모리 사이즈도 굉장히 크게 들어갑니다.”

-4K by 4K를 개발 이전을 하셨다고 했는데, 그거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거는 뭡니까?

“가장 힘들었던 것이 학교에서 모든 반도체의 아날로그 고압 PMIC 그다음에 센서도 들어가는데 센서 리드아웃 IC 그다음에 디스플레이 화소 어레이, 디스플레이 드라이버 다 인터레이션을 하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40명 정도가 있었고 한 5년 정도 경험을 가진 학생이 10명이 달라붙었습니다. 우리가 아날로그는 잘하지만 디지털을 못 해서 디지털은 아웃소싱을 했어요.”

-몇 년 과제 하신 거죠?

“3년 동안에 2개의 버전을 했는데요. 첫 번째 버전은 Full HD 버전을 했고, 그다음에 1년 동안에 Full HD, 그다음 2년 정도해서 4K by 4K를 개발한 거죠.”

-4K by 4K로도 우리가 이렇게 쓰면 볼 만합니까?

“그건 광학 시스템이 받춰줘야 하는데 한국이 광학이 굉장히 약합니다. 그래서 국내에 광학을 잘하는 교수님들이라도 컨소시엄을 해가지고 개발해야 된다. 그쪽 분야를. 그렇지 않으면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미국 같은 데는 칩은 잘 못하지만, 시스템은 하려고 준비를 많이 하고 있거든요. 특히 애플 같은 데는 칩까지 자기네가 하겠다고 하고 있고. 메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메타가 요즘 엄청 공격적으로.

“제가 가장 많이 전화를 받는 데가 애플이고 두 번째가 메타입니다.”

-애플에서는 어떤 얘기를 주로 많이 듣습니까?

“애플은 “자기네가 해보니까 잘 안 되는데 솔루션이 뭐냐?” 그런 얘기를 주로 많이 물어봅니다.”

-메타도 마찬가지입니까?

“메타도 마찬가지고. 제 졸업생 중에 애플팀에 4명이 가 있고요. 메타에 6명이 가 있습니다.”

-메타버스를 하는 팀에서요? 메타버스 하는 쪽으로 학생들이 가 있군요.

“그것도 한국 기업에 있는 학생들을 다 끌어간 겁니다.”

-디스플레이 쪽은 사실상 LCD는 다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봐야 되고. OLED도 지금 소형도 쫓아오려고 하고 있고 하는데. 교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기술 격차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기술 격차가 지금 있습니까? 그것도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 2년 정도의 격차가 있습니다. 2년 정도의 격차가 있는데 2년은 따라잡는 것이 쉽거든요. 가장 큰 것이 중국 업체들이 소형 OLED의 수율이 안 나와서 채산성이 없습니다. 디스플레이는 픽셀 1개만 불량화소가 있어도 아웃이거든요. 굉장히 오래전에 정해진 룰입니다. 중국 업체는 어떻게 하냐 하면 내수용으로 팔아먹습니다. 저가로 팔아먹어서 버리지 않고 쓰는데. 우리나라는 그래도 적어도 90% 이상의 수율을 가지고 있거든요. 중국의 BOE가 제가 작년도에 듣기로 소형이 한 23% 수율 밖에 안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90%까지 올라가려면 괜히 시간이 2년은 걸리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런데 2년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계속 앞서가면 2년이 계속 유지되지만, 멈춰 있으면 2년 쫓아와버리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초격차를 계속 유지할 거냐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슈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초격차를 해야 합니까?

“대안 중의 하나가 올레도스가 대안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되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쓰게 되고. 그 수요도 엄청나게 많고 그건 반도체 경기도 좋아지고 디스플레이 경기도 좋아지는 겁니다. 그것이 대안 중에 하나이고. 또 하나는 LG디스플레이가 열심히 하고 있는 투명 디스플레이. 그다음에 롤러블 디스플레이 그런 것들이 하나의 돌파구가 되는데. 그런 것들은 아직까지 아주 강력한 응용 분야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응용 분야의 개발을 세트 업체에서 많이 해줘야되는 거군요.

“그렇죠. 그런 것을 해주지 않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거든요.”

-교수님께서 지금은 과제 하시는 것 중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현재 과제 하는 것 중의 모바일향 OLED 과제를 올해까지는 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징이 있는 과제입니까? 얘기해도 됩니까?

“지금 하는 것은 게임용 모니터의 OLED가 360프레임까지 돌릴 수가 있거든요. 360프레임으로 돌리면 소비전력을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천천히 돌려야 되는 데는 15프레임 돌렸다가 지금 가변 프레임 레이트로 15프레임에서부터 60프레임, 30프레임, 60프레임 120프레임, 240프레임, 360프레임까지 어댑티브하게”

-종류별로 이렇게 한다는 겁니까?

“종류별이 아니고 영상에 따라서 합니다.”

-영상에 따라서요. 자동으로 자기가 합니까?

“자동으로 하는 그런 디스플레이를 이미 개발은 했습니다.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디스플레이를 개발하신 겁니까? 아니면 회로 소자를 하신 겁니까?

“디스플레이 화소 회로하고 구동 방식을 개발한 거죠.”

-또 조만간 어딘가에서 나오겠네요.

“이미 나오고 있고 좀 더 개선하면 또 나올 겁니다.”

-이미 그게 나오고 있습니까? 교수님한테 여쭤보면 앞으로 디스플레이 쪽에 새로운 기술이라든지 이런 것도 많이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그래서 가변 프레임 레이트를 중국은 못 하거든요. 그래서 이것들을 계속 발전해 나가는 것이 초격차 기술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교수님 그런 과제는 교수님 측에서 “이런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먼저 제안해서 과제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쪽에서 먼저 와서 “이런 것 좀 해주세요” 라고 해서 하시는 겁니까?

“저한테 와서 대부분이 어떤 걸 원하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제가 한 2~3개를 던져줘요. 2~3개 중에 그쪽에 뽑아서 “이거 해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쪽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서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교수님이 지금 생각하시는 내년 내후년도에 이런 거 좀 해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하시는 게 혹시 있습니까? 올레도스 이런 거는 이미 개발되고 있는 거니까.

“올레도스가 지금 8K x 8K는 토탈 프레임이 바뀌어야 된다. 그걸 하려면 엄청난 이노베이션이 없이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쪽에 제가 올인해서 끝내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해상도가 더 높은. 그럼 완전 구조가 다 바뀌어야 되는 겁니까?

“굉장히 많이 바뀌어야 됩니다.”

-기판부터 이런 게 다 바뀌어야 합니까?

“실리콘 기판도 많이 바뀌어야 됩니다. 지금 제가 적용했던 가변 프레임 레이트도 필요하니까 소자도 바뀌어야 되고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됩니다.”

-그 정도 하려면 몇 명 정도 인력이 몇 년 정도 해야합니까?

“기업체 인원이 한 적어도 100명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팀을 한 100명쯤을 꾸리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애플을 보면 그 팀만 400명이 있습니다.”

-진짜 나오기는 나올 건가 보네요?

“제가 보면 언젠가는 되겠죠.”

-교수님 개인적으로 투자도 많이 하시지 않았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투자…”

-그러니까 스타트업에 투자를 했다든가.

“그것도 많이 했죠. 많이 했는데 거의 다 돈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주로 투자는 교수님들한테 투자하거나 했는데 그분들이 열정이 없어요. 열정이 없고, 남의 돈 따먹고 나면 넘어지는.”

-그래도 성공해서 엄청나게 크게 엑시트한 사례가 있다거나 이러지는 않습니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한 10명 정도의 교수님들한테 적게는 5000만원 많게는 2억원 정도 투자를 했는데.”

-교수 창업하시는 분들한테요?

“근데 1개도 건진 게 없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교수라는 돌아갈 직업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요?

“본인이 먹고 살길이 있으니까. 목숨 걸고는 안 하거든요.”

-그렇군요. 교수님 제자분들 중에는 창업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제 제자 중에 창업한 친구들이 한 대여섯 회사가 있습니다. 그 친구들도 지독하게 제 말을 안 들어서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노베이션이 굉장히 중요한데. 외부하고 이노베이션도 해야 되고 내부에서 이노베이션도 해야 되는데 고집들이 너무 세요. 그래서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하고 중국이 지금 패권 전쟁이라고 해서 미국에서 수출 들어가는 것 장비 수출 들어가는 것도 막고 한국에 거기 공장도 있는 건데 거기 지금 노후 공장으로 다 전락하는 거 아니냐 이런 걱정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십니까?

“제가 TI에 있을 때 플라자 합의도 있었고, 그때만 하더라도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반도체 넘버원은 일본이었거든요. TI가 왜 D램을 팔아먹었냐 하면 굉장히 심플합니다. 일본이 하는 걸 딱 보니까 TI가 D램 1등을 하고 도시바가 항상 2등을 하는데 TI 제품을 내놓고 딱 3~4개월 후에 제품이 나와 있고 이익을 보면 TI는 하거나 적자를 보는데 도시바는 돈을 제일 많이 벌어요. 그래서 TI가 생각했던 것이 2등 하자. 1등 하지 말고. 근데 3~4개월 정도로 2등 하자 그렇게 하려면 간첩이 있어야지 그렇게 되죠. 도시바에다 간첩을 어떻게 파견할 겁니까. 못 하거든요. 그래서 그때 TI의 회장이 2등 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래서 D램이 망하기 시작한 거죠. 1등 하니까 매일같이 적자 보는데 그러면 안 되고 한 3~4개월 차이로 2등 하자.”

-도시바는 늦게 했는데 어떻게 또 이익을 그렇게 남길 수 있었는지.

“왜냐하면 앞에 가는 걸 보고 모든 피저빌리티 테스트 안 하고 몇 개만 가지고 테스트를 해서 가거든요. 정보가 흘러 들어오니까.”

-TI 거 정보를 잘 받았다라는 얘기인 거군요.

“왜냐하면 TI는 TI 재팬에 있기 때문에 그 정보가 일본 사람들끼리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상 일본 사람끼리는 왔다 갔다 대학 동문도 있고 하다 보면 술 한 잔 굉장히 좋아하니까 일본 사람들은. 술 한 잔 먹다 보면 얘기가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근데 TI는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도시바 정보를 캐낼 수는 없어요. 그걸 또 지시를 하면 부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TI가 메모리를 접었군요.

“TI가 그래서 D램이 2등 하다가 보니까 3개월 차이로 2등 하긴 했는데. 6개월 차이로 2등하고 2등 하는 전략으로 가다 보니까 어느 땐 9개월 만에 하고 그러다 보니까 메모리를 접을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시에 인텔도 D램 접지 않았었습니까?

“D램은 인텔이 먼저 접었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1980년대에 미국이 일본한테 꿀밤을 날렸죠. 지금도 그런 상황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저는 그런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이 되고요. 그래서 그때만 하더라도 TI가 가장 벤치마킹하던 회사가 어디냐 하면 NEC입니다.”

-NEC요?

“NEC가 반도체도 잘하고 통신도 잘하고 컴퓨터 잘하는 회사였거든요. “이 3개를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망할 일이 없다” 하고 생각을 했었죠. 근데 NEC가 그렇게 망할 줄은 몰랐죠.”

-우리가 그때 반사이익을 얻었죠?

“엄청 많이 얻었죠.”

-이번에도 그런? 지금은 후발주자들이라서 추격을 늦추는 이런?

“그게 아니고 제가 그냥 판단하건대 그 반사이익을 받을 때가 일본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

-현재 시점에서는요?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왜냐하면 일본은 중국말을 엄청 잘 듣거든요. 미국에 거의 같은 편이나 마찬가지로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데 일본도 반도체를 일으키겠다는 의지는 엄청나게 있습니다. 근데 반도체를 다 뺏겼기 때문에. 주로 한국에 다 뺏겼습니다. 그래서 그걸 되찾고 싶어 하는 욕망이 굉장히 크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 기술이 다 일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 굉장히 조심해야 되고, 미국을 거스르면 우리가 살아남기 굉장히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일본이 굉장 교활하게 잘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쪽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국하고 미국 중간에 있지 않습니까? 근데 일본처럼 이렇게 확 가기도 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미국을 배신하거나 배반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하고 어떤 스탠스를 우리가 할 거냐 하는 것을 잘 판단을 해서 해야죠.”

-줄타기를 잘해야 된다는 거군요.

“그래서 산업별로 줄타기를 잘해야 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얼마 전에 반도체 보조금 관련해서 뉴스 보도 나온 것들이 한창 신문 기사에 많이 나왔습니다. 보조금을 받으면 초과이익에 대해서는 셰어링을 해야 한다거나 들어가서 공정을 같이 본다거나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달렸는데 그런 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너무 언페어한 거죠. 옛날에 일본을 칠 때도 거의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저도 도시바 팹을 가서 봤고요. 절대 안 보여주는데 미국 정부가 윽박지르니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어쨌든 ‘미국에 들어와서 보조금을 받으면’ 이라는 단서가 있으니까 안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근데 안 들어가고 우리가 미국에서 서바이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파운드리라든지 이런 걸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군요. 한국의 반도체 분야의 지원 혹은 디스플레이도 일부 전략산업으로 지정됐다고 저는 알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다고 보십니까?

“정부도 첨단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분야에 외국에서 세제혜택을 주는 만큼은 적어도 해야지만우리도 서바이벌을 할 수가 있죠. 그게 없이는 서바이벌이 안 되거든요. 경쟁하려면 적어도 투자하는 비용에 더해 R&D 투자비용까지 세제혜택을 많이 줘야지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많이 막혀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많이 막혀 있고요. 국회에서 정해줘야 되는데 국회의원들은 항상 표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잘 안 되는 거죠.”

-여당이 야당 되면 또 반대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슬기롭게 현 정부가 좀 풀어나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런 산업들이 잘 돼서 고용을 통해서 일부 세금을 회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저희 채널에 오셨는데 얘기 안 하신 게 있으실까요?

“앞으로 메타버스 디스플레이하고 메타버스 시스템을 국내에서 지금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이 유리한 점이 디스플레이도 잘하고 있고 반도체도 잘하고 있거든요. 그 2개를 융합하는 거에다가 더해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서 광학 시스템을 잘해서 세트를 잘 만들면 성공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그것을 애플이나 메타나 구글한테 뺏겨버리면 우리는 먹을 게 별로 없거든요.”

-지금 전방 산업이 스마트폰, 텔레비전, PC, 최근에는 전기차까지 하는데, 메타버스에 대한 어떤 장밋빛 전망에 대해서 얘기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는데. 메타버스 시장이 기존에 큰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이나 PC 같은 시장 정도로 커질 수 있다고 교수님은 보십니까?

“저는 그 정도로는 커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메타버스를 제대로 하려면 여러 가지를 고려를 해야 합니다. 인체에 유해하지 않도록 안전성을 보장해야 됩니다. 앞으로는 많은 젊은이들은 실생활에서 하는 것보다 가상 세계에서 활동을 더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우리가 그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술을 거기 안에 담아야 할지 하는 고민을 해야 되는 거죠. 메타버스 플랫폼의 스탠다드도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데. 거기도 참여를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별로 참여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쪽도 더 열심히 참여해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의대 가는 것 때문에 의대로 학생들이 많이 가서 저도 굉장히 답답한데 그 공대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퀄리티가 가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다 의대로 가지 않습니까?

“의대로 가고 모수가 줄다 보니까 더 못한 인재들이 오는 거죠. 그런 인재들만 가지고는 우리나라 산업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저는 그걸 극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우리나라에 이민을 받을 수 있는 이민청을 만들어야 되고. 이민을 와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이민 온 사람이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엄청나게 배타적이지 않습니까.

“배타적이기 때문에 그걸 바꾸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 그다음에 제가 보면 미국도 의대를 많이 선호합니다. 스탠퍼드 의대 교수를 하는 의사가 MIT 학부를 나오고 하버드 의대를 나왔거든요. 그 친구가 나한테 하는 얘기가 “자기가 의대 와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자기가 MIT에서 같이 공부하던 AI 하던 친구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훨씬 더 자기보다 더 잘 살더라”

-돈을 더 잘 벌더라.

“돈을 더 잘 벌더라. 괜히 의사를 했다. 왜 나보고 왜 안 말렸냐”하고 컴플레인을 해요. 미국은 그런 상황입니다. 한국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국내 대기업을 보시면 알겠지만, 삼성전자에 똑같이 들어가도 메모리사업부에 갔냐, 시스템LSI사업부에 갔느냐에 따라서 PS(성과급 제도)가 다르거든요. 그건 말이 안 되죠. 개개인의 업적에 따라서 PS가 가야 되는데 어느 부서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PS를 줄 때 어떻게 잘 될 수가 있겠냐. 미국 회사는 내 봉급을 와이프한테도 못 가르쳐줍니다. 와이프가 딴 데 얘기해 그게 퍼져버리면 나는 그다음날 잘리거든요. 그래서 내 봉급을 개인 통장에 받아서 와이프한테 옮겨줍니다. 진짜 비밀을 잘 지켜야 해요”

-미국은 개개인별로 이렇게 뭔가 성과 보상 제도가 다 다른가 보군요?

“호봉이 같아도 잡 그레이드가 다르면 연봉이 2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호봉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받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본인의 보스하고 본인 밖에 몰라요. 연봉에 대해서는. 그런 시스템으로 가지 않으면 누가 열심히 하려고 그러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시스템을 빨리 바꿔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한국은 뭐가 강하냐 하면 딴 건 잘 모르겠고 기회도 균등해야 되는데 결과도 균등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기회만 균등하면 되지 결과는 균등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많이 노력하면 결과가 달라지니까 거기에 따라서 인센티브를 가져가는 거죠. 미국의 많은 회사들은 상위 0.1%에 속하면 연봉의 30~40배의 인센티브를 줍니다. 그걸 10년만 모으면 평생 먹고도 남아요. 그래서 열심히 하죠. 그런데 한국은 그게 없잖아요. 누가 열심히 하려고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페이닥터 해도 연봉을 꽤 받는 의대를 선호하는 거군요.

“그런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의 의사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잘 버는 공학자들이 많이 나오면 좋은데 말이죠. 교수님도 근데 좀 많이 벌지 않았습니까?

“저는 TI 있을 때 많이 벌었죠. 한국에 와서는 쓰기만 했죠. 한국에서 번 게 없습니다.”

-학생들이 봤을 때 “저걸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라는 꿈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거 같은데요.

“한국에 산학과제를 하더라도 특허가 산업체하고 반반씩 갖도록 돼 있거든요. 50대50으로 지분을 같도록 돼 있는데, 학교에서 쓰고 싶으면 산업체 허가를 받아야 돼요. 허가를 절대 안 하죠. 그러니까 혼자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미국은 산학과제를 하면 특허를 학교가 100% 갖고 있거든요. 자기네가 가져가고 싶으면 사야 돼요.”

-근데 사인하고도 아까 그 회사는 돈도 안 줬다면서요?

“개인이 사인한 거니까 회사 대표이사 사인을 해야죠.”

-교수님 오늘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다음번에 또 한 번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리_박효정 PD gywjjdd@thele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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